1481 |
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를 보면 양림산(陽林山)의 기록이 보이는데 현의 서쪽 2리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바로 사직공원이 자리한 양림동 뒷산으로 추정 된다. 이를 보아 조선초기에도 양림이란 이름이 불리웠을 것으로 보이며 다만 한자적 표기가 다를 뿐이다. |
1611 |
정암(鄭庵)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비문에 양촌(楊村)정선생이란 표기로 보아 이 당시 마을 이름을 양촌(楊村) 혹은 양림촌이라 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. |
1759 |
여지도서에는 광주목(光州牧) 부동방면(不動坊面)으로 기록되어 있고 효자 정암(鄭庵)조의 내용을 보면 그 문려(門閭)는 양림촌(陽林村)에 있다고 기록 되어 있다. |
1789 |
호구총수의 기록에는 광주목 서면(西面) 부동방리(不動坊里), 방수(方樹), 신사 직(新社稷)으로 기록되어 있다. |
1809 |
광산현(光山縣)의 일부, 1871년 광주목의 일부, 1895년 5.1 23부제의 실시에 따라 나주부(羅州府) 관할 광주군(光州郡)의 일부, 1896년 13동제 실시에 따라 전라남도(全羅南道)광주군의 일부로 있었다. |
1904 |
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권에는 광주군 양림리(楊林里)교회가 성립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. 이는 광주 최초의 교회예배이기도 하다. |
1912 |
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(不動坊面) 양림리(楊林里) 교회가 성립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. 이는 광주 최초의 교회예배이기도 하다. |
1914 |
4.1 조선총독부 부령 제111호 의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(不動坊面) 양림리(楊林里), 방림리(芳林里), 원지리(院旨里), 신사리(新社里) 각 일부를 합하여 전라남도 효천면(孝泉面) 양림리(楊林里)가 되었다. 당시 이 지역에는 갱 변, 뒷동산, 흙구댕이 마을이 있었다. |
1923 |
4.1 부 고시 제 140호 의거 광주면의 확장에 따라 효천면 양림리는 광주면(光州面) 양림리가 되었다. |